이구령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헌부장령, 봉상시령, 능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범(汝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5년(인조 23)
사망 연도
1715년(숙종 41)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봉상시령|능주목사(綾州牧使)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사헌부장령, 봉상시령, 능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범(汝範). 할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고, 아버지는 별검(別檢) 이진규(李震奎)이다. 어머니는 좌승지 심광수(沈光洙)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허목(許穆)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허목이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여 왕의 노여움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나자 스승을 돕기도 하였으며, 허목이 죽자 상복을 입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에 남인이 실각하자 이구령도 서울을 떠나 태백산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 뒤 1689년 음보로 도원찰방(桃源察訪)으로 있다가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이어 저작, 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93년 충청도사(忠淸都事)가 되고, 이어 1707년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1709년 봉상시령을 거쳐, 외직으로 나아가 능주목사(綾州牧使)가 되어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세우는 등 여러 가지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뒤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머물면서 왕의 소명도 모두 거절하고, 다시는 서울의 도성문에 들어서지 않았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성호문집(星湖文集)』
『옥천문집(玉川文集)』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