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9년(충정 1) 윤7월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거쳐 1350년 3월 연성군(延城君)으로서 경상·전라도도지휘사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였고, 이듬해 8월에는 만호 인당(印瑭)과 함께 서강(西江)에서 왜구를 막게 하였지만, 그는 전밀직(前密直)으로서 장수가 아니고 또 녹봉을 받는 것도 아니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1352년(공민 1) 9월에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켰을 때 판삼사(判三司)에 임명되었다가 난이 실패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옥에 갇혔다가, 그해 10월에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354년 6월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고우(高郵)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하여 서경의 수군 300여 명을 이끌고 연경(燕京)으로 갔으나, 남쪽에 있는 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져 힘껏 싸우다가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최원(崔源)과 함께 전사하였다. 같은 해 6월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