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병욱(炳旭). 호는 강재(强齋). 전라남도 담양 출신. 아버지는 이경수(李敬秀)이다.
1912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4년 3학년을 중퇴하고 경성중국어강습소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문학을 연구하면서 봉천(奉天) 시내에서 해천양행(海天洋行)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광한단(光韓團)·한족회(韓族會)·독립단 등의 동지들과 연락을 담당하였다.
또, 북경(北京)·상해(上海) 등지에 있던 이시영(李始榮)·신채호(申采浩)·노백린(盧伯麟)·김규식(金奎植)·김동삼(金東三) 등을 비롯하여 남북만주에 있던 김좌진(金佐鎭)·윤세용(尹世茸)·전덕원(全德元)·이호연(李浩然) 등과의 연락을 맡아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에서 활약하는 한편, 국내로부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쫓겨 만주 및 중국 본토로 망명하는 지사들의 행로 마련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봉천연락기관장 윤세용의 지령을 받아 안동현(安東縣)에 주재하는 광한단원 김손(金遜)·김준경(金俊景)·백성근(白成根) 등과 연락하여, 권총·탄환·폭탄 등의 무기를 국내로 수송하던 도중 홍영식(洪榮植)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평양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흥경현(興京縣)에 있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1924년 2월 통의부의 수령 김동삼으로부터 현익철(玄益哲)·홍경식(洪景植) 등과 더불어 국내에 잠입하여 대한통의부 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분자 암살, 중요기관 파괴 및 군자금을 모금하라는 지령을 받고 임시정부 발행의 공채증권과 특파원사령서와 권총을 지니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유한기(柳漢基)·박정양(朴正陽) 등을 규합하여 서울 효제동의 대한통의부 경성지부를 설치하고 이탁(李沰)을 지부장으로, 본인 외 3명은 참모로 활약하였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지에 비밀 연락기관을 두어 많은 청년 동지를 모으고 각 지방 부호에게 협박장을 발송하고 위협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한편, 고관·친일파 암살계획 및 관공서 폭파계획을 세워 활약하다가 1924년 10월에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도받고 경성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경성현 최가둔(慶城縣崔家屯)에서 10여 년간 농장을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청년계몽운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 뒤 독립투사들을 결합하여 독립동지회를 조직, 중앙위원 겸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