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직으로 관직에 올라 겸사복(兼司僕)으로 있던 중 1502년(연산군 8) 무과에 급제하였다. 김효손(金孝孫)을 지극히 섬겼으며, 1505년에는 내자시부정으로 있다가 특별히 임금의 배려로 군기시부정으로 옮겼다.
덕천군수를 거쳐 1510년(중종 5) 부산포첨사가 되었으나, 부실한 준비로 왜노(倭奴)를 공격한 잘못으로 처벌받았다. 중종대에 들어와 삼척부사·위원군수·북도우후(虞候)·화양첨사(花梁僉使)를 역임하면서, 성격이 사납고 불법적인 행동이 많다는 대간의 탄핵을 자주 받아 관직이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중종으로부터 무재(武才)가 있다는 두둔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