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 출생이다(북청 출신으로 1900년대 중반에 일본 동경에 유학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192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의 민간군사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2년 만주로 가서, 지청천(池靑天)·김학규(金學奎) 등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참여해 항일전선에 직접 나섰다.
1933년 중국 본토로 옮겨, 1935년 난징[南京]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지청천과 함께 참여하였다. 지청천이 1936년 4월 조선민족혁명당을 탈퇴해 조선혁명당을 재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였다.
1937년 7월 임시정부에서 신설한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의 위원에,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찬위워회(議政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만들어지자 중앙집행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총사령부가 충칭[重慶]에서 창설되자 참모로 임명되었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군사위원회 위원과 광복군 제2지대 부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44년 초 광복군 총사령부의 군사학편찬위원으로 군사교재를 편찬하였으며, 정령(正領) 계급으로 총사령부의 고급참모에 보임되기도 하였다.
또, 1945년 3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창설된 광복군 제3지대의 부지대장에 임명되어, 4월 말에 부임하였다. 광복 직후 제3지대를 지휘해 각지에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파견, 일본군 내의 한적사병(韓籍士兵)의 접수에 진력하였다.
1946년 6월 귀국한 뒤에는 주로 광복군출신자들의 지원을 위해 진력하다가 6·25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이래 지청천·김학규와 동일한 노선을 걸었던 무장(武將)이었으나, 전혀 군인티가 나지 않았던 성품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