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숙(繼叔). 한양 출신이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자이며, 아버지는 이산부정(伊山副正) 이사성(李嗣盛), 어머니는 홍주 송씨(洪州宋氏) 별시위(別侍衛) 송평(宋枰)의 딸이다.
유년기의 삶은 구체적이지 않다. 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23세 때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26세 되던 해인 1510년(중종 5)에 형 하원수(河源守) 이찬(李纘)이 이과(李顆)와 함께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추대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고 노영손(盧永孫)이 밀고했다. 이에 연루돼 맏형인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은 경상도 초계(草溪)로, 그는 전라도 명양현(鳴陽縣)으로 유배됐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당당했으며 한시와 서예에 모두 뛰어났다. 그의 「몽한시(夢漢詩)」를 신선 세계의 아름답고 슬픈 노래로 비유하기도 하며, 그의 필치를 중국의 서예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견주기도 한다.
유배된 지 14년 만인 1523년(중종 18) 39세 되던 해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담양의 대곡(大谷)에 은거하며 의리학(義理學)의 서적에 침잠했다. 또 은거할 때에는 후진의 교육에도 전념했다.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탐독해 검소한 생활을 즐기며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귀양에서 풀린 뒤 서울로 돌아갔으면 왕족에 걸맞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이를 거부하고 담양에 머물러 은거생활을 한 것은 고고한 그의 인품을 말해준다. 문집으로 『몽한영고(夢漢零稿)』3권 1책이 전하고 있다. 뒤에 추성수(秋城守)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