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성종의 아들인 견성군 이돈을 추대해 역모를 꾸몄으나 노영손의 밀고로 유배된 종실·문인.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풍채가 당당했으며 한시와 서예에 모두 뛰어났다. 그의 「몽한시(夢漢詩)」를 신선 세계의 아름답고 슬픈 노래로 비유하기도 하며, 그의 필치를 중국의 서예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견주기도 한다.
유배된 지 14년 만인 1523년(중종 18) 39세 되던 해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담양의 대곡(大谷)에 은거하며 의리학(義理學)의 서적에 침잠했다. 또 은거할 때에는 후진의 교육에도 전념했다.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탐독해 검소한 생활을 즐기며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귀양에서 풀린 뒤 서울로 돌아갔으면 왕족에 걸맞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이를 거부하고 담양에 머물러 은거생활을 한 것은 고고한 그의 인품을 말해준다. 문집으로 『몽한영고(夢漢零稿)』3권 1책이 전하고 있다. 뒤에 추성수(秋城守)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 『몽한영고(夢漢零稿)』
- 『수산집(修山集)』
- 『이조가사정선』(이상보, 정연사, 1965)
- 「이서의 낙지가 고찰」(정익섭, 『국어국문학』24,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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