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광하(光夏). 평안북도 위원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이듬해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서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기원독립단이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통합되고 다시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개편되자, 소대장에 임명되어 일제의 주구단체인 일민단(日民團)·보민회(保民會) 등과 싸워 독립운동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5년 6월 평안북도 초산·벽동에 밀파되어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우편소, 기타 일제기관을 파괴하였다. 1927년 3월 10여명의 대원을 이끌고 국내로 잠입하여 벽동군 우시면의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숙직하던 일본경찰 1명을 사살하고, 장총 4자루와 탄환 200여발을 노획한 뒤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태워버렸다.
이밖에도 네 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다수의 일본경찰을 살상하고 군자금도 모금하였다. 참의부(參議府) 제2중대장 김용택(金龍澤)이 중국 보갑대(保甲隊)에 잡히자 그 후임으로 중대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작전을 수행하다가, 신의주경찰서원에게 잡혔다.
1928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929년 평양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대전·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광복을 맞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