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광주(光州)]. 자는 가보(家父). 이기(李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밀직제학 이홍길(李弘吉)이고, 아버지는 이일영(李日英)이다.
1419년(세종 1) 진사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1423년(세종 5)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史官)으로서, 앞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에 의거함으로써 사실(史實)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 그 실상을 직서(直敍)하도록 하였다.
1431년(세종 13)에 집현전부교리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뒤 형조참의·첨지중추원사·병조참의를 거쳐 1444년(세종 26)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1446년(세종 28) 예조참의를 거쳐 한때 삼의사제조(三醫司提調)를 지냈다.
이듬해 호조참판에 오르고, 1448년(세종 30)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고려사』 개찬을 감장(監掌)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때 서북지방의 군제(軍制) 정비, 야인의 객관(客館)을 별치(別置)할 것, 어염세(魚鹽稅)를 확보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단종이 즉위한 뒤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어서는 전염병 방제에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