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설성(雪城). 자는 여실(汝實), 호는 거천(巨川).
어려서부터 중국어에 능통하였으므로 중국사신이 내왕할 때마다 역관으로 종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에 가서 사자관(寫字官)에 보직되어, 명나라에 발송하는 주요문서를 도맡아 썼으므로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로 특채되었다.
1629년(인조 7) 사은사(謝恩使) 윤안국(尹安國)의 수행원으로 아들 이상고(李尙古)와 함께 명나라에 가던 도중, 각화도(覺華島)에서 배가 침몰되어 죽었다. 선조 때 중국사신 일행 중 한 사람이 성장(蟶腸: 음식의 일종)을 찾아 헤매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아 이를 이해하지 못하자 음식을 구해주지 않는다고 노하여, 왕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였을 때 그동안의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언화는 당시 상중에 있었는데, 왕이 불러 물으니 과연 통하여 알았다. 이로부터 교지를 내려서 중국사신이 왔을 때에는 두 사람의 차비관(差備官)을 두도록 하였다. 서예에 능하였는데, 특히 해서를 잘 써서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숭정대부 판중추부사(崇政大夫判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