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가성(可成). 이한(李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이맹상(李孟常)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원사 이전지(李全之)이다.
어릴 적부터 총민하고 독서를 즐겨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곧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이 되었다. 1443년 집현전박사가 되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 때 동료 유효련(柳孝聯)과 다투어 유효련은 벌을 받았으나 이예는 경연관이라 해 용서받을 정도였다. 1447년 문과 중시에 급제해 계속 집현전에 들었다.
집현전부교리 때 집현전직제학 신석조(辛碩祖)와 함께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아 3년 동안 365권을 완성하였다. 그 뒤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의 편찬에 참여했고,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전후 15∼16년을 집현전에 있으면서 유신(儒臣)으로서의 능력을 보였다.
세종이 죽고 문종·단종조에서 부수찬·집의 등을 맡아보았다. 그 후 세조의 즉위에 온건하게 대처해 살아남아 판봉상시사가 된 이래, 첨지중추원사와 각 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1461년(세조 7)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6년에는 발영(拔英)·등준시(登俊試)에 급제해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황해도관찰사가 된 이래 이조참판·대사헌·개성유수 등을 거쳤다. 개성유수로 있을 때 임금이 행행(行幸)해 백성들의 송사가 없음을 보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려 포상하였다. 1476년 공조판서, 1480년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형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경국대전』이 완성될 적에 부녀의 재가금지와 재가녀 자손의 폐고(廢錮)를 서선(徐選)과 함께 추진하기도 하였다. 5대의 왕을 섬기면서 박학과 다문으로 문명과 명망이 높았다 한다. 시호는 문질(文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