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건지(健之), 호는 옥국재(玉局齋). 아버지는 생원 이기중(李箕重)이며, 판서 이태중(李台重)의 조카이다.
1759년(영조 35)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 해 세마(洗馬)가 되고, 부수(副率)를 거쳐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정랑에 부임하였다.
뒤에 금성현령과 면천군수를 역임하고 1781년(정조 5) 황간현감으로 재직하던 중 기강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암행어사 이정운(李鼎運)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세마로 있으면서 큰 활약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또 다시 사복시주부로 발탁되었으며, 1784년 세자 책봉 때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의 책문관(冊文官)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금산군수를 거쳐,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극진하게 시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그 뒤에도 침착하게 일을 처리해 신임을 얻어 계속 승진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용모가 특히 단정하고 평온한 인상을 풍겨 들판에 서 있는 인자한 노인처럼 보였다 한다. 항상 마음에 여유가 있어 집에 식량이 떨어져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집안을 청소하면서 단정히 정좌해 책을 탐독하였다.
평소 바둑을 좋아했는데, 만년에는 더욱 좋아해 탐닉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김조순(金祖淳)의 아버지가 성천 지방의 유명한 옥돌[玉石]을 보내니, 비로소 바둑판[碁局]을 만들어 주야로 좌석에 놓아두고 즐기면서 스스로 ‘옥국재(玉局齋)’라 했다 한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 탁지문(度支門) 액자를 쓰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옥국재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