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조선 중기 한학 4대가의 한 사람인 이정구(李廷龜)의 손자로, 이소한(李昭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주이씨(驪州李氏)로 좌찬성 이상의(李尙毅)의 딸이다.
할아버지 이정구와 큰아버지 이명한(李明漢)은 모두 제학 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와 사촌형제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일가가 사림을 이루었다.
1651년(효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설서로 있다가 문과중시에 장원을 하였다. 165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660년(현종 1) 교리로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1663년 승지가 되었으며, 1666년 대사간, 1668년 도승지가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를 논할 때 형조판서로서 대공제(大功制: 만9개월)를 주장하였다. 같은 해 현종이 죽자 애책문(哀冊文)을 찬진한 바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복상문제로 유배당하자 벼슬에 나가지 않고 관동지방을 유람하였다. 김만중(金萬重)의 장인이며, 저서로는 『동리집(東里集)』과 『동리소설』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