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우(季羽), 호는 농재(農齋). 이지신(李之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할(李劼)이다. 아버지는 호조참의 이유겸(李有謙)이며, 어머니는 윤홍유(尹弘裕)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 3)에 진사가 되고, 1657년(효종 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설서·사서를 거쳐 1659년 정언이 되어 대신이 술을 마시고 실태하는 것을 논박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사간(司諫)이 되어 송시열을 무고하는 영남유생 유세철(柳世哲) 등을 탄핵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674년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유배되면서 같은 서인으로 지탄을 받다가 1679년 양덕(陽德)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동부승지에 보직되고, 이어 대사헌·홍문관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682년 형조·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사직하자 함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다시 광화부유수·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8년에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광주부유수가 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기사환국 등으로 민암(閔黯)이 정권을 잡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이익도 장흥부(長興府)로 귀양가서 배소에서 죽었다. 신의가 있고 높은 지조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수교집록(受敎輯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