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흠(稚欽), 호는 향파(香坡).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4대손이며,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당은군(唐恩君) 이인령(李引岭)이다. 아버지는 밀산군(密山君) 이찬(李澯)이며, 어머니는 이유훈(李有訓)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참봉으로 1651년(효종 2)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통천군수가 되었으나 김세룡(金世龍)의 처의 일로 파직되었고, 1655년에는 금성현(錦城縣)에 있는 경현사(景賢祠)의 일로 참의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61년(현종 2) 판결사가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다. 1664년 2월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서천(舒川) 천방사(千房寺)의 승려가 일으킨 폭동을 공주영장(公州營將) 양일한(楊逸漢)으로 하여금 자기 소관이 아닌 한산(韓山)·임천(林泉) 등지에 파견하여 승려들을 체포하고 진압한 사실이 뒤에 조정에 보고되지 않은 것이 알려져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공조참판이 되고, 1667년 동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북경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였는데, 특히 송설체(松雪體)로 일가를 이루었다. 글씨로는 「현감죽계조응록묘비문(縣監竹溪趙應祿墓碑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