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익(汝翼). 이규관(李奎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난(李灤)이고, 아버지는 통훈대부 이상연(李尙淵)이다.
1699년(숙종 25) 사마양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 1700년(숙종 26) 진사로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1704년 사헌부장령에 취임하여 기강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때로는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곤경에 빠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장령을 지낸 것으로 보아 관기확립에 적당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09년 임양군(臨陽君)이 진하사(陳賀使)로 중국에 갔을 때 그 서장관으로 동행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사간원헌납을 거쳐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사람이 재략만 있으면 신분적 제한을 초월하여 발탁하자는 탁월한 주장을 하여 왕의 호의적 반응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또다시 헌납으로 부임하여 범죄수사에 있어서 신속 정확을 주장하면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참군 윤석래(尹錫來)와 안산군수(安山郡守) 윤식(尹寔) 등의 처벌을 요청하였다.
1714년 좌부승지가 되고 1722년(경종 2) 강원도관찰사로 나갔으며, 2년 뒤 다시 경기도수군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양역(良役)의 고통과 백성의 부담을 줄이도록 상소하였다. 1727년(영조 3)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732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자리를 옮긴 뒤, 2년 후 동지의금부사에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