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년(공민 11) 3월에 전 사관편수관((史館編修官)으로서 시무 10조를 올렸다. 1364년 대호군 이성림(李成林)과 함께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중국의 장사성(張士誠)에게 가서 보빙(報聘)하였다.
1371년 7월 신돈(辛旽)이 대사를 일으키려 할 때 선부의랑(選部議郎)으로 신돈의 문객이 되어 몰래 흉모를 자세히 기록하였다가, 일이 급해지자 한림거사(寒林居士)라 칭하고 글을 써서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져놓고 급히 도망하였다.
김속명이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여 순위부(巡衛府)에 명령하여 신돈의 무리를 잡아 처벌하였다. 1381년(우왕 7) 6월 지문하부사상의(知門下府事商議)로 죽었다. 시호는 익효(翼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