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관헌자료에 이인수(李仁洙)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황해도 해주 출신.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입학하였다. 1923년 9월 간토[關東] 대지진 이후 니혼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해주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4년 이후 해주청년회의 간부 및 해주노동동맹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2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년 10월 서울콤그룹의 지도조직인 고려공산동맹 중앙위원, 고려공산청년동맹 조직부 담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3·1절을 맞아 황해도 신원청년회 및 『동아일보』 지국 주최 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하였다.
1925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대항단체를 결성하려는 서울콤그룹의 의도에 따라 개최된 전조선노농대회에 해주 준비위원으로 참석하였다. 1925년 8월에는 해주 유학생친목회 순회강연에서 ‘어떻게 할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26년 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추진할 목적으로 결성된 레닌주의동맹에 참가했고, 같은 해 8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의 합동위원회에 참여, 단일한 고려공산청년회(합청)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달 ‘통일고려공산청년회’, 일명 ‘합청’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 10월 화요회 그룹과 ML 그룹이 통합하여 만든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이 결성되었을 때 당 만주총국 위원이자 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황해도 대표로 출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만주에 있는 무장부대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 당의 지도 아래 중국혁명에 참가시키자고 제안하여 참석자들로부터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1927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하필원(河弼源)이 중앙대회에 참석하라는 지시에 따라 이종희(李宗熙)에게 책임을 넘기고 국내로 들어왔다. 한편, 1927년 11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선전부 담당 중앙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 때 검거되어 193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폐병에 걸려 1932년 1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