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년(목종 12) 정월 김치양(金致陽)의 음모와 대부시(大府寺)·천추전(千秋殿)의 화재로 왕이 병을 얻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 우승선(右承宣)으로서 공부시랑(工部侍郎) 이주정(李周禎), 좌사낭중(左司郎中) 유충정(劉忠正), 합문사인(閤門舍人) 유행간(庾行簡) 등과 함께 왕 옆에서 숙직(宿直)하였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20년(현종 11) 2월에는 사신으로서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에 갔다오기도 하였다. 1022년 정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10월 사헌대부(司憲大夫)를 거쳐 1028년 3월 낭중으로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1030년 2월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11월에는 태조공신(太祖功臣)이라고 사칭하고서 아들에게 음직(蔭職)을 주었다가 발각되어 어사잡단(御史雜端) 최연수(崔延壽)로부터 파면의 탄핵을 당하였다. 1031년 11월 동경유수사 호부상서(東京留守使戶部尙書)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