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와서 그 담당자들이 낮은 신분 출신으로 동네의 심부름꾼과 다름없이 되었으므로 이정(里丁)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군현 이하의 하부조직으로는 면(面)·사(社)·방(坊)·동(洞)·이(里)·촌(村) 등 여러 명칭이 있었는데, 이정은 이 단위 행정구역을 통치하는 사람이다.
≪경국대전≫의 호전(戶典)에 의하면, 군현의 향촌에 오가작통(五家作統:범죄자 색출, 세금 징수, 부역 동원 등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다섯 민가를 한 통으로 묶던 호적제도)을 편성하고 5통마다 이정을 두고 면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둔다는 사항이 기재되어 있어서 성종 때 이미 이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675년(숙종 1)에 이르러 격심한 흉작으로 전국 일원에 걸쳐 유민(流民) 사태가 벌어지자 비변사는 21조로 된 <오가작통사목 五家作統事目>을 제정했는데, 여기에 보면 “5∼10통 규모의 촌락을 소리(小里), 11∼20통 규모의 촌락을 중리(中里), 20∼30통 규모의 촌락을 대리(大里)로 규정하고, 이마다 이정 1명과 유사 2명을 임명하여 이내 사무를 관장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얼천류(庶孼賤類) 중에서 이정과 면윤(面尹)을 임명하는 관례를 시정하여 향촌의 관리자가 되기에 알맞은 고령의 덕망 있는 사람을 임명하도록 한다고 되어 있다. 또 피역자(避役者)가 발생하여 다른 지방으로 도망했을 때는 통주가 이정에게 그 사연을 보고하고, 이정이 다시 면윤을 거쳐 수령에게 보고할 것을 규정하고 있어 수령·면윤·이정·통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정 통치구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가작통제를 운영하는 향촌 임원들의 직무를 보면, 면윤의 통솔을 받는 이정의 임기는 3년으로 되어 있다. 이정의 지위와 기능 발휘 양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구이동 현상의 시정 기능이 수령과 더불어 이정에 의해 집행되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정이 이내의 인구이동 현황을 수령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장(杖) 70도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둘째, 양민이 삭발하고 승려가 되는 풍조를 시정하는 데 이정과 수령은 같은 차원에서 통치책임을 지고 있었다. 셋째, 출생 및 사망자 신고, 신도자(新到者) 신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호적법 시행에 있어 수령의 직무를 보좌하는 말단조직의 실무자인 것이다. 이정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오늘날의 이장(里長)으로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