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심부(審夫), 호는 순계(醇溪). 이계화(李繼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보천(李輔天)이다. 아버지는 이재성(李在誠)이며, 어머니는 유은(柳憖)의 딸이다.
1807년(순조 7)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과 의령현감을 지냈다. 1835년(헌종 1) 현감으로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전적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춘추관기주관으로 『순조실록』의 편찬에도 참가하였다.
도당록회권(都堂錄會圈)에서 4점을 얻었고 1837년 헌납이 되었다. 홍석주(洪奭周)를 탄핵하기 위하여 삼사가 합계(合啓)할 때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아 영암에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수찬이 되었다.
이 해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조세관계와 국내의 사정을 관찰하고 귀국하여 보고하기를 “청나라에서는 농민들의 납세액이 토지 10묘(畝)에 3두2승(三斗二升)인데 정역(丁役)은 1년에 은 6돈3푼(六錢三分)뿐이고, 광제원(廣濟院)을 두어 백성을 치료해주며 육영당(育嬰堂)을 설치하여 고아들을 기른다.”고 복명하였다.
1842년에는 수찬으로 장릉(長陵)과 인릉(仁陵)의 친제(親祭) 때 예의 집행을 잘 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고 가자되었으며, 그뒤 공조참의를 거쳐 북청부사가 되어 재직중 사망하였다. 저서로 『음례고증(飮禮攷証)』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