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재(惕齋)·하당(荷堂).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후예이며, 이중휘(李重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고, 아버지는 서윤 이현숭(李顯崇)이며, 어머니는 홍수헌(洪受瀗)의 딸이다. 홍중복(洪重福)의 사위이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정릉참봉(貞陵參奉)을 거쳐 익위사사어를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에 출입해 자주 의견을 진술하였다. 1750년(영조 26) 합천군수로 있으면서 다시 식년 문과에서 삼장장원(三場壯元: 초시·복시·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함)을 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여주목사·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51년 대사간 때 권신 김상로(金尙魯) 형제를 신임사화 당시의 적당(賊黨)이라 탄핵했다가 대신을 능욕했다는 죄명으로 거제도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계속 “신은 국가의 세록지신으로서 나라의 일이 날로 비뚤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냥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립니다.”라고 해 강경한 자세로 투철한 애국심을 보였다.
4개월 뒤 다시 정의현으로 옮겨졌다가 1753년 풀려난 뒤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면서 강직하게 살아갔다. 오원(吳瑗) 등과 사귀는 한편 특히 윤심형(尹心衡)·이태중(李太重) 등과는 더욱 친밀히 지냈다.
평소 강직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져 사색당파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죽은 뒤에 김상로 형제의 비위를 힘써 탄핵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조 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척재집(惕齋集)』·『국조명신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