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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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체육회 창립총회발기인,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한 체육인.
인물/근현대 인물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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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체육회 창립총회발기인,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한 체육인.
내용

생몰년 미상. 보성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가쿠원중학(聖學院中學)을 졸업한 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평소에 운동을 좋아하여 게이오대학 재학 시절인 1917년에는 동경 유학생 야구단(일명 반도팀)의 매니저로 고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 뒤 도쿄대학 이재과(理財科)에 입학했으나 재학중이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 4월 말 동경에서 유학생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이원용(李源容) 등과 체육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뜻이 맞아 민족체육단체를 만들기로 약속하고, 그 명칭을 조선체육회로 할 것까지 검토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7월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야구선수였던 변봉현(邊鳳現)이 상경하면서 체육회 창립이 급속화되었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되면서 변봉현이 기자로 입사, 4월 10일부터 3일간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글을 써서 일반인들의 체육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같은 해 6월 16일 조선체육회의 발기인대회를 갖게 되었다.

7월 13일에는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70여 인이 모여 체육회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조선체육회(현재의 대한체육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중국은 조선체육회 탄생을 위한 발기인 및 창립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체육회 창립을 위하여 35조로 된 규약을 만들었고, 창립 후에는 간사직을 맡았다. 조선체육회 창립 후 첫 번째 사업으로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했는데, 규칙이 제대로 없어 이원용과 함께 전일본중등학교 야구대회의 규칙을 번역하였다.

또한, 대회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체육회 간부들의 찬조금과 사회 유지들의 기부금을 받고 시설(경기장)을 마련하는 등 어려운 여건하에서 우리나라의 체육 발전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체육회 50년사』(대한체육회, 1970)
『매일신보(每日申報)』(1921. 2. 16.)
『매일신보(每日申報)』(1921. 2. 15.)
『매일신보(每日申報)』(1921. 2. 13.)
『매일신보(每日申報)』(1920. 11. 7.)
『매일신보(每日申報)』(1920. 11. 6.)
집필자
정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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