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했다. 1918년 북청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4년 졸업한 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 졸업했다. 재학 중 조선일보 학생문예 공모에서 「나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도쿄 릿쿄[立敎]대학을 거쳐 1930년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1931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1931년 11월 동지사에 가입해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2월 ‘코프(KOPF: 조선협의회)’에 안막(安漠)·박석정(朴石丁)과 같이 참여했고, 같은 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1월 별나라사건에 연루되어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1934년 출소 후 고향인 북청에 귀향해 인쇄회사인 북청문화주식회사와 양조장 등에서 근무했다.
1937년 계급적 경향의 시집 『대망(待望)』을 출간한 이래 『분향(焚香)』(1938), 『망양(望洋)』(1940)을 발간했다. 이 무렵부터 계급적 경향이 사라지고,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공습 이후 친일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4년 징병제의 실시를 전후한 시기에는 「송 출진학도(送 出陣學徒)」(『신시대』1944. 2)를 발표하면서 노골적인 친일시를 썼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해방기념시집인 『횃불』을 발간하고, 곧바로 월북하여 함경남도 혜산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함남일보사 편집국장, 조선문학예술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4월에는 송시(頌詩)인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과업시를 많이 썼다. 조소문화협회 서기장·부위원장, 문화선전성 문화국 부국장 등을 역임했다. 1974년 1월 5일 사망했다.
이찬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06∼43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