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 7월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하자, 어사대(御史臺)의 조예(皂隸)인 이통이 개경이 빈틈을 타서 경기지방의 초적(草賊)과 개경 성중의 노예들을 불러모아 반란을 일으켜, 유수와 병마사를 쫓아내고 삼군을 편성하였으며, 여러 절의 승도(僧徒)를 모아서 공사(公私)의 전곡(錢穀)을 약탈하였다.
이에 왕이 추밀원부사 조염경(趙廉卿)을 중군진주(中軍陣主)로, 상장군 최근(崔瑾)을 우군진주(右軍陣主)로, 상장군 이자성(李子晟)을 후군진주(後軍陣主)로 삼아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적은 관군이 강화로부터 온다는 말을 듣고 강변에서 맞아 싸웠으나, 승천부(昇天府 :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동쪽 교외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어 견룡행수(牽龍行首) 별장 이보(李甫)와 정복수(鄭福綏)가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먼저 개경에 이르니, 적이 문을 닫고 성을 지켰다. 그러자 이보가 속여 말하기를, “우리가 관군을 파하고 돌아왔으니, 속히 문을 열라.”하니 문지기가 그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 이보와 정복수 등이 문을 지키던 자와 이통을 베고, 이자성이 바로 도착하여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 난은 국가통제력이 약화된 기회에 노예와 초적 및 승도들이 함께 일으킨 점에 특징이 있으며, 몽고가 침입하자 왕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만 강화도로 피난하는 데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