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은 고려시대의 신분계층이다. 직역을 담당하는 인리(人吏)·향리(鄕吏)·기인(其人)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를 근거로 촌락의 지배자인 촌장(村長)·촌정(村正)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지연적·혈연적으로 결합된 사회집단으로, 군현인(郡縣人)으로 구별되는 신분층이라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구별되는 신분층이 아니라 토성(土姓)와 연결하여 접근하는 견해도 있다. 읍치가 확대되면서 주변의 촌락이 흡수되어 읍사의 지배기구에 참여하는 촌장·촌정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인리백성(人吏百姓)’ · ‘향리백성(鄕吏百姓)’ · ‘기인백성(其人百姓)’ 등으로 직역(職役)을 담당하는 인리 · 향리 · 기인과 연기(連記)되어 사용된 예가 흔하다. 이 경우에 백성을 일반국민 · 인민으로 해석한다면 위의 용어들이 제대로 풀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첫째, 인리 · 향리 · 기인과 마찬가지로 지방 행정의 말단에 위치했지만, 인리 등이 군현(郡縣)의 지배계층임에 비해 백성은 촌락의 지배자인 촌장(村長) · 촌정(村正)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이때의 촌락은 신라의 지역촌(地域村) 단계는 벗어났지만 아직 조선의 면리제도(面里制度)는 발생하지 않은 과도기적 단계로 설정된다. 백성에 해당하는 촌장 · 촌정은 촌락 내에서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신분은 일반국민 · 인민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군 · 현의 지배계층인 인리 등과 구별된다.
이러한 차이는 촌락 자체가 지방제도로서 국가권력과 직결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다만 촌장 · 촌정이 신분적으로는 일반국민 · 인민과 같다 하더라도, 그들은 부농(富農) 가운데에서 선임되었으므로 사회적 변동기에는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었다. 이는 고려 후기의 변동기에 실현되어 관인(官人) 신분으로의 상승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고려 말기의 백성에 대한 기록과 조선 초기의 문헌에 나타나는 ‘전조판정백성(前朝判定百姓)’이나 ‘고려판정백성’ 등의 용례를 분석해, 백성을 특정 신분층으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백성은 백성성(百姓姓)이라는 특징적인 성씨를 갖고 있으면서 지연적 · 혈연적으로 결합된 사회집단이다. 이들은 향(鄕) · 소(所) · 부곡(部曲) 등 천민집단과 구별되는 군 · 현인의 신분을 가졌으며, 인리성(人吏姓) 집단과도 구별되는 계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차역(差役)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담당한 역은 이(吏) 계층의 향역(鄕役), 지장(紙匠) · 묵척(墨尺) · 수급(水汲) · 도척(刀尺) 등 간척(干尺)이 지는 천역(賤役), 군인이 부담하는 군역(軍役) 등과는 구별되며, 이들 역을 제외한 여러 종류의 잡역(雜役)이었다.
그런데 백성의 역이 일반농민, 즉 백정(白丁)의 역과 비슷해 백성을 일반농민으로 해석하게 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조선 초의 ‘전조(고려)판정백성’의 예처럼 일반농민과는 절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양자가 역의 부담에 있어서는 비슷하지만 신분적으로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백성을 인리와 구별되는 신분층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런데 「정두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에는 부호장(副戶長) 품유(稟柔)와 군 백성(郡百姓) 광현(光賢)이 형제로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을 구별되는 신분으로 볼 경우에는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들을 같은 신분으로 보는 세 번째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백성을 성씨집단의 문제로써, 특히 토성(土姓)과 관련지어 실체를 밝히려는 것이다.
토성이란 신라 말기의 성주(城主) · 촌주(村主)들이 호족(豪族)으로 등장해 종래의 신라 귀성(貴姓)을 유지하거나, 고려의 성립과 함께 국가로부터 사성(賜姓)이 되는 등으로 태조 말엽에 이르면 각 지방에 정착되었다. 이때 군 · 현의 읍치(邑治 : 邑內)에 살던 족단(族團)은 그 읍격(邑格)에 따라 각기 주(州) · 부(府) · 군 · 현성으로서 인리성이 되었다. 그러나 군 · 현에 폐합되지 않은 촌 · 향 · 소 · 부곡의 족단은 각기 촌성 또는 향 · 소 · 부곡성을 칭해 인리성과 구별되었다.
그런데 점차 읍치가 확대되면서 주변의 촌락, 즉 직촌(直村)이 읍치에 흡수되어 종래의 촌성 대신 백성성을 칭하면서 군 · 현의 인리성과 함께 읍사(邑司)의 지배기구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백성성을 구성하는 백성은 인리성을 가지는 인리층과 신분적으로 구별될 수 없고, 다만 그 연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백성은 국민 일반, 농민 일반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할 수 없으며, 대체로 읍사의 지배하에 있던 촌장 · 촌정 등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성과 인리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고, 백성의 의미가 고려 전기와 후기, 그리고 특히 말기에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많은데, 그 구체적인 변천과정을 밝히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