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간, 비변사제조,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선경(善卿)
남계(南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9년(영조 15)
사망 연도
1798년(정조 22)
본관
전주
주요 관직
의주부윤|전라좌도수군절도사|경상도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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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간, 비변사제조,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경(善卿), 호는 남계(南溪). 이홍서(李弘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재항(李載恒)이고, 아버지는 이방현(李邦賢)이며, 어머니는 조화벽(趙和璧)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765년 예문관의 검열이 되고 헌납(獻納)·정언(正言)을 거쳐 1772년 회양부사가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간, 1783년 의주부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784년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787년 대사간에 올랐다. 1790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792년에는 다시 대사간에 올라 강직한 탄핵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1796년에는 비변사제조가 되었다. 그 이듬해인 1797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서는 지방 유력자들을 누르고 서민들을 위하여 전정(田政)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효열(孝烈)을 장려하고 노비들의 신공(身貢)을 덜어주기 위하여 중앙정부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798년 이 지방에 흉년이 들어 고통을 받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빈민들에게 나누어줄 곡식의 보급이 늦어져 소란이 생기자, 이에 대한 영남어사(嶺南御史) 여준영(呂駿永) 등의 탄핵을 받고 가산군(嘉山郡)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으나, 그뒤 곧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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