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경(善卿), 호는 남계(南溪). 이홍서(李弘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재항(李載恒)이고, 아버지는 이방현(李邦賢)이며, 어머니는 조화벽(趙和璧)의 딸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765년 예문관의 검열이 되고 헌납(獻納)·정언(正言)을 거쳐 1772년 회양부사가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간, 1783년 의주부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784년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787년 대사간에 올랐다. 1790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792년에는 다시 대사간에 올라 강직한 탄핵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1796년에는 비변사제조가 되었다. 그 이듬해인 1797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서는 지방 유력자들을 누르고 서민들을 위하여 전정(田政)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효열(孝烈)을 장려하고 노비들의 신공(身貢)을 덜어주기 위하여 중앙정부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798년 이 지방에 흉년이 들어 고통을 받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빈민들에게 나누어줄 곡식의 보급이 늦어져 소란이 생기자, 이에 대한 영남어사(嶺南御史) 여준영(呂駿永) 등의 탄핵을 받고 가산군(嘉山郡)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으나, 그뒤 곧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