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원보(元輔), 호는 백봉(栢峯). 이명전(李命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준익(李駿翼)이고, 아버지는 이우정(李宇鼎)이며, 어머니는 진주정씨(晋州鄭氏)로 정진교(鄭鎭矯)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에 예부(例付)되었다. 1757년 목릉별검(穆陵別檢)을 시작으로, 1758년부터 이후 3년간 성균관전적·예조정랑·병조좌랑·춘추관기주관·종묘서영(宗廟署令)·흥덕현감 등을 지냈다.
1767년 통례원통례, 1769년 강동현감을 지낸 뒤 장령의 명을 받아 사전(祀典)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여 왕이 이를 흔쾌히 시행하도록 하였다. 1772년 사간원정언이 되어 여러 차례 시정의 폐단을 논하여 영조의 신임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해 7월 장령이 되어 여러 대관들과 합계(合啓: 연명으로 계문을 올림)하였다가 엄한 견책을 입어 흑산도로 유배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3년 뒤인 1774년 풀려나게 되어 다시 장령으로 서용(敍用)되었다가 홍봉한(洪鳳漢)·조영약(趙榮約)을 탄핵하는 소를 올린 일로 다시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9년 뒤인 1784년 적소에서 방환되었으나, 그해 11월에 죽었다.
영조 말년에서 정조 초년의 혼미를 거듭한 시벽파(時僻派) 정쟁으로 희생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당색은 남인계였던 것 같고 아울러 시파 쪽에 서서 노론벽파를 비판하였던 것 같다.
저서로는 『백봉집(栢峯集)』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