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중(子重), 호는 남곡(南谷).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천군(龜川君) 이수(李睟)이고, 아버지는 봉래군(蓬萊君) 이형윤(李炯胤)이며, 어머니는 최행(崔行)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3년 유학으로서 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을 재상에 임명할 것을 소청(疏請)하여 임용하게 하였다. 1644년(인조 2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650년(효종 1) 지평으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문학(文學)·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1660년(현종 1)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집의로 실록청의 편수관이 되어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동안 은진현감·금성군수·광주목사(光州牧使)·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 사간으로 있을 때 조선에 표착한 청인(淸人)의 송환을 위협적으로 요구해온 청나라에 대하여 비굴한 정책을 쓴 대신들을 탄핵하다가 유배된 이숙(李䎘) 등 간관들의 구제를 역설한 죄로 온성에 유배되었다. 그뒤 한재(旱災)로 방환(放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