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 ()

목차
신종교
단체
1930년 채경대(蔡慶大)가 창교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이칭
이칭
삼성교(三聖敎), 천인교(天人敎), 신농사(神農社)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1930년 채경대(蔡慶大)가 창교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내용

1914년 보천교(普天敎)에 입교한 채경대는 탁월한 식견과 비범한 언행으로 교주인 차경석(車京石)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최고위 간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2년 14명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보천교를 탈퇴하여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의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 사당을 짓고 별도로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30년 사당(祠堂)에 선도종장증산신성(仙道宗長甑山神聖) 불도종장진묵대사(佛道宗長震默大師) 유도종장회암선생(儒道宗長晦菴先生) 등 삼성(三聖)을 봉안하고, 삼성교(三聖敎)라는 이름으로 포교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 특히 보천교의 이탈자들이 몰려들었다. 교세가 커지게 되자, 그는 1931년서울 정릉 부근으로 본부를 옮기고 교명을 천인교(天人敎)라 하면서 신도들에게 본격적인 수련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36년 4월 조선총독부가 증산계 각 교단에 가한 폭압령에 따라 교단 간부들은 구속되고 교단은 한때 해산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형무소에서 출소한 채경대는 1936년신농사(神農社)라는 개척단을 조직하여 만주 봉천성 강평현 박인촌(博仁村)으로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켜 신농농장(神農農場)을 세우는 한편, 통화성 유화현 대전자촌(大甸子村)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인촌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0년 9월 그의 사망을 계기로 교단이 여러 갈래로 분파되었으며, 교단 간부들마저 일경(日警)에 체포됨으로써 교세는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8·15광복 후 김종수(金鐘洙) 등 20여 세대가 귀국하여 전주시 금암동에 판자촌을 건설하고 집단생활을 하였지만, 판자촌이 철거당하자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백오동에 집을 마련하여 본부로 정하고 김종수가 개발한 갱생법(更生法)이라는 건강법을 보급하는 방법으로 교화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96년 김종수가 사망함으로써 현재는 거의 소멸상태에 있다. 신앙 대상은 초기에는 증산, 진묵, 주회암이었으나, 그 후 상제(上帝:甑山)와 단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단군이 곧 상제이며 상제가 곧 단군이라는 신관(神觀)을 갖는다.

또한 초기부터 삼계(三戒) 오잠(五箴)을 신도들의 계율로 삼아 왔는데, 삼계란 ① 난법난도자(亂法亂道) ② 음양부정자(陰陽不正者) ③ 사위감행자(私僞敢行者)를 경계하는 것이다.

오잠이란 ① 불온악(不穩惡) ② 불피혐(不避嫌) ③ 불숙원(不宿怨) ④ 不飾非 ⑤ 불절기(不折氣)를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문헌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류병덕·양은용,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한국신흥종교총감』(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한국민족종교총람』(사단법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 1992)
『증산교개설』(홍범초, 창문각, 198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