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원인(圓人). 경기도 포천 출생. 1893년 상경하여 1895년 관립 외국어학교가 설립되자 일본어부(日本語部)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일본어부의 교과목에 ‘관청급상용부기(官廳及商用簿記)’가 있었으므로 그 때 부기를 습득하였다. 1906년 광성의숙(廣成義塾)이 설립되자 1907년 그 학교의 강사가 되었다. 1908년 전임강사가 되고, 1909년 학교명이 휘문의숙(徽文義塾)으로 개칭되면서 학감(學監)이 되었다.
1916년 제2대 휘문의숙장에 취임하였고,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교장이 되었다. 1922년 재단이사를 겸임하다 1924년에 사임하였다.
1908년 두권의 부기서(簿記書)를 출판하였고 보성전문학교에서 부기학 강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체육회의 간사로서 청소년들의 체력 향상에 진력한 바도 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직·간접으로 주시경(周時經)의 영향을 받은 최두선(崔斗善)·장지영(張志暎)·이병기(李秉岐)·김윤경(金允經) 등 15, 6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민간학회로 창립하여 초창기 우리 나라의 국어운동에 이바지하였다.
온양에 있을 때인 1932년 이순신(李舜臣)의 묘소와 위토가 경매될 경지에 이르자 각계각층의 성금으로 부채를 청산하여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현충사를 중건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약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시종 일본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아산군 자치회장으로 추대되어 혼란기의 치안유지에 앞장섰으며,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사립온양중학원의 원장으로 취임해 뒷날 온양중학교로 승격하는 기틀을 마련하였고, 온양지방의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교육자이며 학자로서 한문과 국어에 능통하여 유고의 시조집이 있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역사·생물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요 저서로는 『간이상업부기』(1908)와 『신편은행부기학』(1908)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