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랑(仲郎), 호는 청오헌(聽悟軒). 할아버지는 임주석(林周錫)이고, 아버지는 임봉휘(林鳳輝)이다.
음사(蔭仕)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정언이 되고, 영조 때에 장령(掌令)·필선·헌납(獻納)·사간·보덕 등을 거쳐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죽은 뒤인 1796년(정조 20) 대호군 이득신(李得臣)의 추천으로 청백리에 천거되었다.
특히,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각사(各司)의 이서(吏胥)의 수를 삭감할 것, 서쪽의 덕현(德峴)과 동쪽 30리의 승사(僧舍)를 철훼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고, 일을 안이하게 처리한 포도대장 이봉상(李鳳祥)과 행동이 비루했던 정읍현감 이익형(李益炯)을 탄핵하여 교체시켰다.
1727년(영조 3) 대동혜청(大同惠廳)의 관리철저로 창고의 소루함이 없도록 상소하기도 하였고, 문학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담양의 구산사(龜山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