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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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두 발로 바퀴를 돌려서 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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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람이 두 발로 바퀴를 돌려서 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기기.
내용

사람의 힘에 따라 스스로 굴러간다고 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자행거(自行車)’라고도 불렀다. 두 바퀴가 한 줄로 달린 것이 대부분이나 어린이가 안전하게 타고 다니도록 하기 위해 뒷바퀴를 두 개 붙인 자전거가 있는데 이를 ‘세발자전거’라 한다.

자전거는 1790년 프랑스의 시브락(Sivrac, C. de)이 목마에 바퀴를 만들어 붙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818년 독일의 드라이스(Drais, K. B.von)가 목마의 바퀴를 개량하여 만든 드라이지네(Draisine)가 원조라는 설이 유력하다.

최초의 자전거는 단순히 사람이 발로 땅을 차면서 앞으로 나가게 된 것이었으며, 앞바퀴가 좌우로 움직여서 방향을 돌리게 된 것은 1816년경에, 발을 땅에 대지 않고 달리게 된 것은 1839년에, 공기타이어를 붙인 것은 1886년에 나왔으며,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나 기능을 지니게 된 것은 191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윤치호(尹致昊)가 미국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그는 미국에서 두 차례 귀국하였는데, 첫번째는 1883년 한미수호조약 비준 때 미국공사의 통역관으로, 두 번째는 갑신정변에 가담한 뒤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895년에 돌아왔는데, 그가 자전거를 언제 들여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05년 12월에 제정, 실시한 「가로관리규칙(街路管理規則)」에 “야간에 등화 없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금한다.”라는 조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무렵에 자전거가 어느 정도 보급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또, 당시에는 자전거상인들이 이의 보급을 위하여 많은 상금이 걸린 경기대회를 자주 열었다. 제1회 대회는 1906년 4월 22일 훈련원[지금의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서쪽]에서 열렸는데, 육군 참위(參尉: 현재의 소위)였던 권원식(權元植)과 일본인 요시가와[吉川]가 결승을 다투었으며, 상금이 당시로서는 큰 돈인 100원(圓)이었고(황성신문 1906년 4월 16일자), 외국인까지 참가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1908년 군부에서 긴급한 공무에 쓰기 위하여 자전거 2대를 수입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무렵에는 관청에서도 자전거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자전거를 잘 타는 것으로 이름을 떨친 이는 엄복동(嚴福童)이었다. 그는 일본인들도 참가한 자전거대회에서 거의 언제나 1등을 차지하여, 당시 “쳐다보니 안창남(安昌男), 굽어보니 엄복동”이라는 동요까지 유행하였다. 안창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였다.

이 두 사람은 일제의 압정에 시달리던 한민족에게 등불 같은 존재였다. 1920년 5월 2일 경복궁에서 열린 시민대운동회의 자전거경기에서 엄복동이 마지막 40바퀴를 다 돌고 경쟁자였던 일본인은 몇 바퀴를 남겼을 때 주최측은 돌연 경기를 중단시켰다. 이에 분개한 엄복동이 본부석으로 달려가 우승기를 찢어버렸고, 일본인들은 달려들어 그를 구타했는데, 보다못한 관중들이 들고 일어나 큰 혼란이 일어났으며,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사태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엄복동이 일본인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할 때마다 사람들은 쾌재를 부르며 울분을 달랬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에 광분한 일제는 휘발유 등의 자동차연료가 부족하게 되자 목탄이나 카바이드로 대용하는 동시에 자전거에 트레일러를 이어붙이고 사람을 실어나르게 하는 촌극을 연출하였다. 1938년 8월 서울에 나타난 이 괴상한 자전거를 사람들은 ‘인동차(人動車)’라고 불러 비웃었다.

서울의 자전거 수는 1946년에 2만 9507대였고, 이듬해에는 5만 2451대로 늘어났으나 1948년에는 오히려 1만 2070대로 줄었다.

이 무렵에는 자전거가 오늘날의 자가용자동차 구실을 하여 많은 직장인들이 출퇴근하는 데 이용했고, 관공서에 드나드는 민원인들도 거의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시청과 같은 큰 기관이나 신문사 등에는 허가를 내어 일정한 요금을 받고 자전거를 보관하여주는 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자가용승용차와 오토바이 등의 보급과 교통혼잡 등으로 인하여 대도시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농촌의 청소년들은 아직도 통학에 많이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전거생산은 1950년대 후반에 파이프가 생산되면서 본궤도에 올랐고, 1989년 현재 약 650만 대가 보급되었다.

오늘날에는 자전거수출국으로 명성이 높다. 자전거에는 상업용이나 소하물 운반에 쓰는 자전거, 통근·통학 및 장을 보는 데 쓰는 자전거, 어린이들이 타는 작은 자전거, 그리고 경주용자전거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서울잡학사전』(조풍연, 정동출판사, 1989)
『서울육백년사』3·4(서울특별시, 1979·1981)
『개화백경』3(이규태, 신태양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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