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전하지 않고 다만 노래의 생성배경에 관한 이야기가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의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에 전하고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장한성은 신라의 국경인 한산(漢山) 북쪽 한강가에 있었는데, 신라에서는 거기에 중요한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 뒤에 고구려에게 점령되었지만, 다시 군사를 일으켜 성을 도로 찾고 이 노래를 지어서 그 공적을 기념하였다고 한다.
‘장한성’은 원래 고구려의 경내에 있던 것을 백제의 온조왕이 빼앗아 성을 쌓았으며, 근초고왕 때에는 도읍으로 정하기도 하였으나, 개로왕 때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왕이 피살되었다.
뒤에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에 국경을 정하고 신라에 흡수한 이래 선덕여왕과 진평왕대에는 고구려와 충돌이 격렬하였던 곳이어서, 이러한 충돌과정에서 승리한 신라인의 노래로 여겨진다.
특히, 603년(진평왕 25)에 격전이 있었는데, 왕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하니, 이러한 전승을 통하여 잃어버린 땅을 회복한 기쁨과 적군을 물리쳐 민생을 안정시킨 왕에 대한 송축의 뜻을 담은 노래로 추정된다. 이 노래는 신라 궁중의 악장으로 소용되다가 고려가 건국한 이후에도 속악으로 습용(襲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