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승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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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깎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며 속인과 마찬가지로 사는 승려들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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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재가승촌은 머리는 깎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며 속인과 마찬가지로 사는 승려들의 마을이다. 스스로 산문이라 하여 공동의 불당을 세우고 혼례나 장례 등의 중요한 의식을 이곳에서 행하는 비승비속인(非僧非俗人)의 마을이다. 우리나라 함경북도 경흥, 경원, 회령, 부령, 은성, 종성 일대에 재가승촌이 있었다. 마을의 불당에는 승려가 없지만 주민들 모두는 불교를 기반으로 생활을 한다. 불경을 잘 알고 불교 의례에 능숙한 사람을 촌장으로 추대하여 마을을 이끌도록 하였다. 마을의 가장 큰 행사일은 사월초파일과 섣달그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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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머리는 깎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며 속인과 마찬가지로 사는 승려들의 마을.
내용

스스로 산문이라 하여 공동의 불당(佛堂)을 세우고 혼례나 장례 등의 중요한 의식을 이곳에서 행하는 비승비속인(非僧非俗人)의 마을이다. 우리나라 함경북도 경흥 · 경원 · 회령 · 부령 · 은성 · 종성 일대에 이 재가승촌이 있었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일설에는 고려윤관(尹瓘)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남아 있는 원주민으로 하여금 이 구역에 살게 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유방이 큰 여자 3,000명과 암말 3,000필을 조공하기로 되어 있어 인조가 여진족의 후예들을 이곳에 살게 한 뒤 그들을 차출하기로 함에 따라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고려도경』에는 “재가화상(在家和尙)들이 가사도 입지 않고 계율도 없이 처자를 데리고 살면서 짐을 운반하고 길을 닦으며, 다리를 놓고 성을 쌓으며, 전란이 있으면 단결하여 방어에 임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마을의 풍습은 다른 마을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마을의 불당에는 승려가 없지만 주민들 모두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생활을 형성하여, 일이 끝난 밤에는 모두 불당에 모여 불경을 배우거나 법고춤을 추었다. 따라서, 불경을 잘 알고 불교의례에 능숙한 사람을 촌장으로 추대하여 마을을 이끌도록 하였다. 불당의 유지비는 마을이 공동으로 부담하였으며, 이 마을의 가장 큰 행사일은 사월초파일섣달그믐날이었다.

그리고 재가승촌 자체의 규율은 매우 엄격하였다. 각 마을을 대표하는 방장(房長)이 있어 조세와 공납 등의 행정적 업무를 맡았고, 도방장(都房長)은 군사에 대한 관리를 맡았다. 방장을 비롯한 관리들의 힘이 컸지만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항상 원로들의 자문을 구하였다.

혼인은 처음 마을 내에서 마을사람들끼리만 이루어지다가 차츰 다른 마을과 혼인하게 되었고, 남자들이 장사 등으로 인하여 출타하는 일이 많아짐에 따라 외지인과의 혼인도 성립되었다. 그와 반대로, 떠돌아 다니던 외지사람들이 이곳에 오게 되면 재가승촌의 여자와 혼인하고 이 마을의 법대로 재가승이 되어 남아 살게 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 남자가 고아 또는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일 때에만 혼인을 허락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불교의 의식대로 화장을 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화장터를 두지 않고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서 화장하였으며, 불에 탄 유골들을 땅속에 묻고 그 위에 버드나무가지를 심었는데, 다행히 뿌리를 잘 내려 자라게 되면 좋은 곳으로 간다고 믿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승려인 성인남자는 참여하지 않고 부녀자와 아이들이 지냈으며, 특히 제사를 지낼 때는 붉은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상 및 부모의 제사도 장남이 도맡은 것이 아니라 형제끼리 서로 분배하였다. 분가할 때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어줌과 같이 제사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이 마을의 여자들은 남자와 같이 바지를 입었으며, 저고리를 짧게 하고, 저고리와 바지 사이에는 너비 약 30㎝ 정도의 허리띠를 매어 젖가슴을 크게 노출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돼지 어금니 두 개를 마주 붙여 색실로 감아올린 호신부(護身符)를 지녔다.

식생활은 산간지방과 승려의 풍습에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잡곡과 산채 등을 주로 먹었지만 특별한 날에는 육식을 하였다. 주택은 큰 방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주택의 주위에 울타리는 만들었지만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주위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생업으로서 남자는 종이를 제조하고 여자는 길쌈을 하며 농사도 겸하여 지었다고 하며, 신분상으로는 모두 하천인으로 대우되었다.

참고문헌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재가승연구」(이강렬, 『불교사상』 21∼25,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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