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종전염병이다. 증상은 격심한 오한, 전율과 함께 계류열(稽留熱:체온의 고저 차이가 1℃ 이내인 고열)이 계속되다가 발한(發汗)과 함께 해열하고 1주일 후에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다. 이 병은 1741년에 장티푸스와 발진티푸스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전염병으로 고정되었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각종 열성전염병과 오진되는 일이 많아서 이 병의 발생을 널리 역사적으로 추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각종 문헌에 기록된 온역(瘟疫)이나 여역(癘疫)과는 다른 학질과 유사한 전염병이라 생각되며, 허준(許浚)이 쓴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에 나오는 온역발황(瘟疫發黃)이라는 표현이 이에 유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이 병이 보고된 것은 1910년에 함경북도 나남(羅南)에서 일본이 파견한 군사 7명에게서 발생하였다는 『조선의학회지』의 「북조선의 재귀열에 관한 보고」가 최초의 역학적(疫學的) 보고일 것이다.
이미 일본의 동북지방에서는 이 병이 20세기 초에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며, 독일이 낳은 세계적 세포병리학자 빌효(Virchow,R.)도 19세기 말에 프러시아의 농민들에게 발생한 역질(疫疾)이 바로 재귀열이고, 이와 같은 역질의 유행을 막는 것은 사회경제적인 조건의 개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함으로써 유럽의 사회위생운동을 제창한 바 있다.
그 뒤 1930년대 이후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그 유행이 매우 심각하였다. 그러나 DDT와 린덴 등 살충제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이 병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병이 발생되는 계절을 보면, 12월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4, 5월에 최고에 달하고 그 뒤 점차 감소하여 10, 11월에 최저에 이른다. 이 병도 발진티푸스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봄에 유행적으로 발생해왔다. 이 병은 활동적인 청소년에게 발생되어왔으며,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발생되었고, 6·25전쟁중에는 군인들 사이에서도 발생되었으나 페니실린요법에 의하여 완전히 치유시킬 수 있었다.
1952년 『의성(醫星)』에 유방현(劉邦鉉)이 보고한 「군대재귀열환자의 임상적 관찰 및 페니실린 투여에 의한 치료성적」에서 보더라도 이 병은 전쟁이나 집단생활, 그리고 불결한 과군거상태(過群居狀態) 때문에 몸에 이가 늘어나면 생겨나기 쉬운, 개인위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전염병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19세기까지 온역발황을 주증(主症)으로 하는 역질이 많았음에 비추어보건대 재귀열이 꽤 유행되어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1960년대 이후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위생상태가 높아짐에 따라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리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도 일부지역에서 발생되었던 말라리아 또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온역발황을 주증으로 하는 이 병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도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이와 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리라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