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번방지』는 크게 목활자본과 필사본으로 나눌 수 있다. 필사본은 다시 한문본과 한글본으로 나눌 수 있다. 목활자본은 영천군(榮川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1693년(숙종 19) 4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
필사본은 6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독의 책도 있지만 『광사(廣史)』,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야사(野史) 총서에 수록되어 남아 있다. 한글 언해본(諺解本) 2종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있으며, 『재조번방록(再造藩邦錄)』[장서각], 『화음기분(華陰寄憤)』[일본 동양문고 · 일본 와세다대학교 도서관 · 연세대학교 중앙 도서관] 등의 이칭을 가진 책도 있다.
신경이 1649년(인조 27) 겨울, 큰딸이 산후병으로 고생할 때의 우울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할아버지 신흠의 『정왜지(征倭志)』를 중심으로 선인들의 글을 모아 임진왜란 중 명의 '재조지은'과 선조의 ‘숭명’ 의지를 전하기 위해 기록하였다. 당시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한 데 따른 울분도 작용하였다.
1659년(효종 10) 3월 아들인 신이화(申以華)에 의해 교열되었다. 목활자본은 영천군에서 1693년(숙종 19) 4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 처음 제목을 후에 ‘화양기분지(華陽寄憤志)’로 바꾸려 하였음은 동양문고본에 있는 1773년(영조 49) 유산자(酉山子) 후서에서 볼 수 있다. 동양문고본은 활자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부록으로 유사(遺事), 창의(倡義) 등을 덧붙여 준비한 완성본에 해당한다.
영주본은 32권의 인용서목(引用書目)을 제시한 후, 권1은 1577년(선조 10)에서 1592년 5월, 권2는 1592년(선조 25) 6월에서 1593년(선조 26) 9월, 권3은 1593년 10월에서 1597년(선조 30) 8월, 권4는 1597년 9월에서 1600년(선조 33) 명의 철군(撤軍)까지 대상으로 하였다.
필사본은 영주본 3권 일부와 4권을 4, 5, 6 세 권으로 나누어 편차하였다. 1권은 임진왜란 전의 동향, 2권은 의병의 거의와 명군의 내원, 3권은 서울 수복과 명과 일본과의 강화 교섭, 권4는 정유재란,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 사건’, 변무(辨誣)와 명의 철군 등을 다루고 있다.
신경이 임진왜란 때 명군의 지원을 '재조(再造)'라는 관점에서 보면서 임진왜란 때 명군의 동향과 외교적 관계를 정리한 야사서이다. 임진왜란 때 명군의 동향과 지원 내력을 알 수 있는 국내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