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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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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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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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
내용

쟁기라는 이름은 ‘잠기’에서 비롯되었다. 1553년(명종 8)에 나온 ≪불설대보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에서 ‘철리경지(鐵犂耕之)’를 “잠기로 가라.”로 새겼고, 윤선도(尹善道)의 시조에도 “잠기연장 다스려라.”라는 구절이 있다.

잠기는 본디 무기를 가리키는 ‘잠개’의 바뀐 말로, 예전에는 농기구를 무기로도 썼기 때문에 두 가지를 같은 말로 적었던 것이다. 잠기는 19세기 초 장기로 바뀌었으며, 오늘날의 쟁기가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쟁기의 형태는 무척 많아 그 이름만도 60여 가지에 이른다. 이를 비슷한 것끼리 묶어보면 쟁기류 8가지, 보류 13가지, 보습류·극젱이류 12가지, 훌칭이류 10가지, 가대기류 5가지, 기타 18가지이다.

또, 쟁기에 딸린 14가지의 부분명칭 가운데 지금의 군(郡) 정도의 거리를 벗어나면 달리 불리는 것도 적지않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쟁기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좋은 보기이다.

쟁기는 뒤지개[掘棒]에서 비롯되어 따비를 거쳐 완성된 연장이다. 쟁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보습으로, 철제가 나오기 전에는 나무를 깎거나 돌을 갈아서 썼다.

가장 오랜 돌보습은 기원전 3000년 전반기의 유적으로 황해도 지탑리에서 나왔다. 57개 가운데 완전한 것은 22개로, 큰 것은 길이 50∼65㎝, 너비 15∼25㎝, 두께 2∼3㎝이다. 형태는 대체로 긴 타원형으로 한쪽 끝은 좁지만 반대쪽은 넓은데, 특히 좁은 날 부분에는 긁힌 흔적이 뚜렷한 것이 많다.

따라서 이들 보습은 시작되는 자루목에 줄을 걸어서 가래처럼 끌어당겨 썼으리라고 본다. 한편, 이 유적에서 피와 조가 출토되어 당시 갈이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벼 재배에 관한 유적은 3,500년 전 영산강 유역인 전라남도 나주군 다치면 가흥리, 2, 000∼3,000년 전의 경상남도 김해 연안리, 그리고 2,300년 전의 울산 방어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들 지역에서도 돌보습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시적인 형태의 쟁기는 기원전 1000년 경의 유적인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에서 나왔다. 참나무로 만든 이 쟁기술은 지면에 평행으로 뻗어나갔으며, 끝이 뾰족하고 볏밥이 뒤로 잘 넘어가도록 윗부분을 손잡이 쪽으로 비스듬하게 깎았다.

손잡이부분에 성에를 끼워박을 구멍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이를 끈으로 잡아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같은 지층에서 수레바퀴가 함께 나왔는데, 이는 소가 쟁기를 끌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기원전 403∼221) 말기의 무덤에서 철제보습이 나왔고, 1세기의 무덤인 산시성 동한묘(東漢墓) 벽화에 쟁기를 쓰는 그림이 등장하였으며, 우리 나라도 기원전 2, 3세기에 삽 따위의 철제농구를 만들었으므로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철제보습을 생산하였으리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쟁기의 사용을 알리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 노례왕조에 나온 기록(製犂耜反藏氷庫作車乘)이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조에도 502년 쟁기를 소가 끌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쟁기나 소 부림의 시초를 알리는 것이라기보다 이의 장려 및 보급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우리 나라의 쟁기는 괭이와 함께 8세기경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인들은 우리의 쟁기를 부리는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 틀의 쟁기는 비교적 길고 곧게 뻗어나간 성에와 앞으로 휘우듬하게 휜 술, 그리고 성에와 술을 고정시키는 한마루로 구성된다. 숟가락처럼 생긴 술 끝에는 땅을 가는 보습이 달리고, 보습 위쪽에 갈린 흙(볏밥)을 한쪽으로 떠넘기는 볏이 있다. 한마루에는 땅을 가는 깊이에 따라 술의 각도를 조정하기 위한 구멍이 한두 개 뚫려 있다.

보습과 볏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목재이나 근래에는 철제의 한마루를 쓰기도 하고, 술바닥에 쇠판(전라남도 고흥에서는 이를 똥개라 이른다)을 대어서 소가 쟁기를 끌 때 잘 미끄러지고 술바닥도 보호하는 효과를 거둔다.

술과 성에 그리고 한마루 가운데 가장 요긴한 것은 술이다. 술 끝에 보습과 볏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각도에 따라 갈리는 땅의 깊이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성에는 사람이나 가축이 끄는 힘을 술에 전달하고, 한마루는 술과 성에를 연결하는 동시에 술로 따라 힘을 받도록 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따라서, 쟁기의 기능은 술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의 쟁기는 술의 형태에 따라 눕쟁기·선쟁기·굽쟁기로 나눌 수 있다. 눕쟁기는 술이 지면에 평행으로 길게 뻗어나간 것으로, 보습은 술 끝에 얹혀 있다. 일본인들이 이를 장상리(長床犂)라고 하는 것도 술이 이처럼 길기 때문이다.

바닥이 평평하여 쟁기를 부리기는 쉽지만 날이 지면과 거의 평행을 이루므로 땅을 깊이 갈 수가 없다. 또, 지면과의 마찰면적이 넓어 그만큼 힘이 더 들며, 무게도 무거운 편이다.

이 쟁기는 평야지대에서는 쓰기 쉬우나, 돌이나 바위가 섞인 거친 땅에는 쓸모가 없다. 땅을 갈 때 술바닥이 땅을 다지고 지나가므로 수분증발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어 용수시설이 부족한 곳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중국 화북지방에서 눕쟁기를 주로 썼으며(동한묘 벽화의 쟁기도 눕쟁기이다), 평안북도 주의리에서 나온 참나무쟁기도 눕쟁기이다.

따라서, 쟁기가 나온 당시에는 우리 나라나 중국이 모두 눕쟁기를 썼고, 선쟁기나 굽쟁기는 재배작물이나 토양에 따라 뒤에 고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선쟁기는 술이 지면에 직각 가까운 각도를 이루며, 우뚝 선 쟁기로 보습은 술 끝에 박혀 있다.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가볍고, 지면과의 마찰이 적은만큼 힘이 덜 든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땅을 깊이 갈기 어려워서 주로 골을 파는 데 많이 쓴다.

안정성이 부족하여 이를 부리는 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며, 차진 땅에서는 쓸모가 적다. 우리의 극젱이 및 훌칭이류의 쟁기와 일본의 무상리(無床犂)는 모두 이에 해당한다. 굽쟁기는 앞의 두 쟁기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술과 지면이 이루는 각도는 약 45°로서, 땅을 깊이 갈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19세기 초 일본에서 고안된 단상리(短床犂)가 그것으로, 이 쟁기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아라시(嵐嘉一)는 그의 ≪이경의 발달사 犂耕の發達史≫에서 “일본의 무상리는 그 원류가 조선이고, 장상리는 중국이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눕쟁기가 우리 나라에서도 널리 쓰인 사실을 알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잘못이다.

한편, 니노가베(二甁貞一)는 그의 ≪농기구금석 農器具今昔≫에서 “장상리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에서 구주지방 및 가나이지방(幾內地方)에 들어왔다.”라고 하였다.

쟁기는 호리라 하여 흔히 한 마리의 소가 끌지만, 거친 땅에서는 두 마리를 나란히 세우는데 이를 겨리라 부른다. 겨릿소 가운데 앞을 향하여 왼쪽 소가 안소, 오른쪽 소가 역소이다. 땅을 갈 때 볏밥이 왼쪽으로 넘어가므로 안소는 힘 좋은 예닐곱살의 소를 세운다.

보통의 멍에는 둥그스름하나 겨릿소의 그것은 쪽 곧으며, 길이는 고랑을 하나씩 사이에 두고 소 두마리가 설 수 있도록 한다. 쟁기는 소가 끌게 마련이지만 소가 없을 때에는 부득이 사람이 끌기도 하였다.

강희맹(姜希孟)은 그의 ≪금양잡록 衿陽雜錄≫에서 “마을에 백 호의 농가가 있으나…… 황소는 한두 마리뿐이어서 소 대신 아홉 사람을 고용하여 땅을 간다.”라고 하였고, 현종 때 돌림병으로 전국의 소가 거의 다 죽자 사람이 대신 끌었다는 기록(현종 11년 8월)도 보인다.

이 밖에 소가 일하기 어려운 데에서도 사람이 쟁기를 끌었다. 오늘날에도 경사가 몹시 진 비탈밭이나 옥수수밭처럼 이랑이 좁은 땅에 북을 줄 때에는 흔히 가족이 한 동아리가 되어 쟁기질을 한다.

부부인 경우 지어미는 앞서고 지아비는 뒤에 서는데, 이것은 앞에서 끌기보다 뒤에서 조절하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강원도 정선군일대에서는 밭 가는 일을 품앗이로도 한다. 쟁기와 소는 각 집에서 마련하며, 차례에 따라 여러 집의 밭을 갈아 나간다.

쟁기의 능률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심하여 어림잡기 어렵지만, 호리쟁기의 경우, 강원도 도계에서는 하루 논 500여 평을, 밭은 450여 평을 간다. 쟁기무게는 15㎏ 내외이며, 술은 박달나무처럼 질이 단단한 것으로 만드는데, 몸체는 20여 년 쓸 수 있지만 보습은 한 해에 한번쯤 갈아야 한다.

한편, 겨리쟁기는 무거워서 달구지나 경운기로 나르며, 보습무게만 해도 5.5㎏에 이른다. 경기도 백령도에서는 겨리쟁기(이 곳에서는 보연장이라고 한다)로 하루 2,000여 평의 밭을 간다.

쟁기로 논을 가는 방법은 곳에 따라 다르다. 경기도일대에서는 바깥쪽에서 안으로 향하여 갈아 나가는 것을 ‘잦혀간다’고 하고,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바깥쪽으로 갈아 나가는 것을 ‘모아간다’고 한다.

따라서, 모아갈 때에는 쟁기로 몇 번 돌아나갈 것인지 미리 어림잡아서 머리를 알맞게 남겨두어야 한다. 모아갈이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애벌갈이 때에만 갈고, 두번갈이 때에는 잦혀갈이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하면 흙이 고루 퍼져서 어느 한쪽이 낮거나 높아지는 일이 없다. 밭을 갈 때에는 ‘쌍골집이’라 하여 이랑에 대고 한번 갔던 자리로 되돌아오면서 갈아 나간다.

이에 비하여 오며가며 한번씩 번갈아 가는 것을 외골집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한 젊은이의 혼인자격유무를 쟁기질을 올바로 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두었고, 쟁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모르는 머슴은 다른 일을 아무리 잘 해도 새경을 다 받지 못하였다.

경기도 백령도에도 ‘보습을 맞출 수 있어야 농사꾼’이라는 말이 전할 정도로 쟁기질은 중요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
『조선 원시 및 고대사회의 기술발전』(과학원출판사, 1984)
『한국농기구고(韓國農器具攷)』(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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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白翎島)의 물질문화」(김광언, 『서해도서민속학』 1, 인하대학교 박물관, 1985)
「한국 선사시대의 농경과 농구의 발달에 관한 연구」(길경택, 『고문화』 27, 한국대학 박물관협회, 1985)
「동서양 쟁기의 기원과 발달」(박호석, 박사학위청구논문, 충북대학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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