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시호는 소평(昭平). 정구령(鄭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사(鄭賜)이고, 아버지는 사섬시정(司贍寺正) 정난손(鄭蘭孫)이며, 어머니는 노섭(盧攝)의 딸이다.
1479년(성종 10)에 승사랑으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정언(正言)·헌납(獻納)·장령(掌令)·사간(司諫)을 거쳐 시강원보덕으로 서연관(書筵官)이 되어 대가(代加)를 받자 3품관으로 승진하였다. 주변에서는 승진에 연연한다고 비판하였다.
군자감정으로 얼음 저장을 잘못하여 아버지와 함께 파직되었으나 연산군 즉위 후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개성유수를 거쳐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형조참판 재직시 아버지상을 당하자 연산군이 내관을 시켜 권육하고 권육의 뜻을 절구로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강원도관찰사·안주선위사를 거쳐 중종조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자 대간들이 번거로워서 불공정하고, 부랑자를 검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파직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중종의 비호로 평안도관찰사·지중추부사·공조판서·경기관찰사 등을 지냈다.
사신(史臣)이 평하기를 직(職)에 임하여 근간(勤幹)하고, 경외(京外)를 소력(所歷)하면서 많은 성적(聲績)이 있었으나 성품이 불렴(不廉)해서 사리를 위하여 산업을 광영(廣營)하였기 때문에 시인(時人)들이 탐묵제상(貪墨宰相)으로 보았고, 사림들이 천하게 여겼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