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132.8m, 동서 223m, 면적 29,614.4㎡. 최근 왕릉동의 동명왕릉(東明王陵) 앞에서 드러난 절터로 5세기 초엽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확인된 건물터는 18개이고, 회랑(回廊)터는 10개이다.
이 밖에도 더 많은 건물터와 회랑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미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전혀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건물터 외에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구조물 3개가 드러났는데, 그 중 2개는 서구와 동구의 남쪽에 대칭되게 벽돌로 만든 원형의 구조물이고, 나머지 1개는 서구 북쪽 회랑 밖에 정방형으로 된 돌기초 시설물이다.
절터의 평면배치는 크게 5구역으로 되어 있다. 이 절터의 중심부를 이루는 것은 제1구역이다. 여기에는 8각 건물터를 비롯하여 9개의 건물터와 그것을 돌려막은 회랑과 회랑문이 있다. 그 중 8각 건물터는 이 절터의 중심에 놓여 있는 8각 탑터로서 탑 바닥의 단(壇) 한 변의 길이는 20.4m이다.
이 사찰은 8각탑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회랑으로 둘러막은 고구려의 고유한 사찰 형식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불전 배치는 497년(문자왕 6)에 지은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터에서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아스카사(飛鳥寺)의 건물배치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이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은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터에서는 기와와 질그릇 조각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寺’, ‘陵寺’라고 새겨진 것도 몇 개 발견되었다. 이는 정릉사가 동명왕무덤을 위하여 지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