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정선으로 낙향한 고학규의 중시조(中始祖)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의 가옥은 1772년(영조 49) 건축되었다. 이 집터를 닦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봉양리 뽕나무(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가 마당에 있어 가옥의 역사를 추론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며 안채는 ㄷ자 배치의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의 장여도리 구조이고 ―자의 사랑채와 함께 ㅁ자 배치를 하고 있다.
안채의 중앙에는 대청마루 · 윗방 · 안방 · 부엌이 있고 대청마루에서 건넌방이, 부엌에서 부엌방이 ㄷ자로 연결되어 있다. 건넌방은 소유자의 부모가 거처하였으며 전면의 툇마루(목재널천정)가 안방까지 이어져 실내동선을 연결하고 있다.
대청은 연등천정, 우물마루이고, 뒷마당쪽으로는 수납공간으로 사용하는 새마루방이 있다. 윗방과 안방은 외짝 여닫이문으로 이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천정은 고미반자 마감이며 윗방은 할머니, 안방은 할아버지가 기거하였다.
부엌은 집의 규모에 비하여 면적이 작으며 아궁이 위에 안방의 벽장이 달려있고 옆면에는 찬장을 두는 수납공간이 있다. 합각부의 구조는 대들보 위의 중간에서 부엌을 가로질러 보를 걸고서 보의 중간에 안채와 ㄱ자 되게 부엌칸의 종보가 동자기둥에 의해 받쳐지고 있다. 즉 ㄷ자 안채의 지붕높이가 동일하게 되어 있다.
부엌방은 고모가 생활하였으며 작은 툇마루를 뽕나무밭이 있는 정원으로 향하여 두었다. 측면 정원 뒤쪽으로 별채의 곳간채가 있었으나 3년전 장마때 유실되었고 곳간채 옆의 사당은 일제시대 때 철거하였다. 사랑채는 맞배지붕의 홑처마 양식으로 건넌방 쪽에서 마굿간 · 대문간 · 부엌 · 목방 · 작은사랑 · 큰사랑이 일자로 배치되었다.
큰사랑 뒤로 신주를 모신 방이 안채 부엌방과 마주하고 있다. 또한 대문간 측벽에서 안채 건넌방으로 판벽이 있고 서쪽마당의 출입을 위한 협문이 있다. 큰사랑 앞은 원래 봉당이었으나 지금은 마루방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 앞에는 방 · 대문간 · 방으로 된 대문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자연석 주춧돌만 남아있다.
이 집은 넓은 대지 위에 자리하였고 정원을 잘 꾸미고 있다. 원래 외부공간은 마굿간 측면에서 사랑채와 평행되게 흙벽의 기와담이 담장까지 연결되고 중간에 출입을 위한 두짝 협문이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를 볼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안채 대청 측면에서 뒤쪽으로 담장을 두어 서쪽마당을 독립 공간으로 만들고 큰사랑에서 전면으로 ㄱ자 되게 중앙에 두 짝 협문이 있는 담장을 두어 사랑마당을 구획하였다. 즉 사랑채 전면과 안채 서쪽 그리고 동쪽과 뒷면에 각각 담장에 둘러싸인 마당을 두었다. 사랑채는 60∼70년 전 보수를 하였고 안채는 1921년에 기와를 다시 잇고 중수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