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친종장군(親從將軍)·만호 등의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280년(충렬왕 6) 왕이 원나라의 중서성에 글을 올려 일찍이 진도·탐라·일본 등 세 곳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상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박지량(朴之亮) 등과 함께 무덕장군(武德將軍)·관군천호(管軍千戶)가 되어 금패(金牌)와 인(印)을 받았다.
1289년 원나라의 해도(海都, 카이두)가 난을 일으키자 합단(哈丹, 카단)이 합류하였다. 황제가 고려에 지원병을 요청하여 함께 평정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돌아가자 카단의 잔당이 고려의 동북변으로 침입하였다.
다음 해 2월에 중군만호(中軍萬戶)가 되어 금기산동(禁忌山洞)에 주둔하며 카단 잔당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5월에 적이 해양계(海陽界)에 들어왔음을 고하였다. 1291년 정월 카단이 철령(鐵嶺)에 이르려 하니 정수기는 방수만호(防守萬戶)로서 멀리서 위세를 보고 도망쳐 돌아왔다. 당시 적들은 배고픔이 극심하였는데 정수기가 버리고 간 물자와 양식을 얻어 기운을 차리고 결국 양근성(楊根城)을 함락시켰다. 이에 그의 잘못을 물어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그러나 원 황제의 토벌군과 연합하여 카단의 무리를 토벌한 후 만호 박지량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가면서 거둔 쌀을 경기 8현(京畿 八縣)과 동계의 군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