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정의(鄭義)이다.
1399년(정종 1) 종묘서승으로 진사과에 합격, 1395년(태조 4) 요동에서 사람이 오므로 중랑장인 그가 압송해서 돌려보냈다.
1398년 두 차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압물(押物)로서 다녀왔고, 중국에 구류중인 가솔을 위문하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 좌우습유(左右拾遺)를 지냈는데, 환자(宦者)인 승녕주부(承寧注簿) 박문실(朴文實)이 소환(小宦)으로 소사(所司)를 능욕하고 왕명을 멸시하므로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그가 탄핵당하였다.
뒤이어 정언이 되었고, 1405년 헌납이 되어 이목지관(耳目之官)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 1408년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세자에게 학문에 힘쓰게 하였고, 1411년 한성소윤이 되었다. 1421년 제거(提擧) 임군례(任君禮)의 대역사건에 연좌되어 도망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 형 정안도(鄭安道)와 장모·처자를 잡아 가두자 자수하였다. 이어 옥사가 일어나 대역으로 논단(論斷)하여 임군례는 저자 거리에서 환형(轘刑)에 처하여졌다. 이에 그도 연루되어 참형당하였으며, 가산은 적몰되고 처자는 노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