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중원(仲遠). 정자순(鄭子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결(鄭潔)이고, 아버지는 현감 정유강(鄭有綱)이며, 어머니는 신찬(申澯)의 딸이다. 장령 정희등(鄭希登)의 종숙(從叔)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임용되지 못하고, 이듬해 검열에 임용되어 시사(時事)를 직서(直書)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을 거쳐 1524년 강릉훈도로 외임되었다.
이 때 그 인물이 사특(邪慝)하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경기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29년 형조좌랑에 임용되었다. 1532년 당시 권력자인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곤양군수로 외보(外補)되었으나, 곧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정랑·사간·부응교·세자시강원좌보덕을 역임하였다.
1544년 성절사(聖節使) 사행의 불법물건소지의 조사를 위하여 수은어사(搜銀御史)로 의주에 파견되었으며, 그 해 11월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용되었다. 1545년(인종 1)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홍문관직제학을 역임한 뒤, 그 해(명종 즉위년) 명종의 왕위옹립의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그 뒤 좌부승지를 거쳤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대윤 일파로 몰려 공신호와 관직을 삭탈당한 뒤 창성에 유배되었다가, 이약빙(李若氷) 등과 유인숙(柳仁淑) 일당으로 몰려 함께 사사(賜死)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1570년(선조 3)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