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은 문서를 직접 책으로 장정한 것이다. 유성룡은 말년에 자신에게 관련된 일들을 정리하는 저술에 몰두했는데, 이 책도 그가 직접 편집했을 가능성이 있다.
1592년(선조 25) 7월 14일부터 1607년 2월 7일까지에 걸친 76통의 유지(有旨)와 1통의 유서(諭書)가 수록되어 있으며, 차례는 일정하지 않다. 1592년 7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의 것이 46통, 1597년 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의 것 20통이 이 책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선조의 파천을 호종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으로서 군무(軍務)를 통괄하고 12월 이후 삼도체찰사를 맡아볼 때의 시기와, 정유재란이 시작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사도체찰사로 활동하던 때의 것이다.
1604년 이후의 5통은 대개 호성공신회맹(扈聖功臣會盟)에 관계된 것들이다. 유성룡이 주요 관직을 띠고 있던 시기의 것이 대부분이지만, 지방으로 퇴거한 이후의 것도 들어 있다.
내용은 전쟁 상황, 명나라 원군과의 관계 및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 군량미의 조달, 휴전 논의 등 당시의 국무 전반에 걸친 것이다.
유성룡의 지위와 활동에 대한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그가 임진왜란의 극복에서 매우 중요한 소임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의 국정과 전쟁수행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문서를 제책한 것이지만 원래 찍혀 있던 ‘승정원인(承政院印)’·‘유서지보(諭書之寶)’ 등의 인장이나 담당 승지의 수결(手決) 등이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고문서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원본은 안동의 풍산유씨가(豊山柳氏家)에 가장되어 왔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그것을 영인해 활자본 및 해설과 함께 1934년에 조선사료총간 제5집으로 간행한 바 있다. 규장각에는 후대의 필사본으로 보이는 건책(乾冊)이 영본으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