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숙간(叔幹). 정사(鄭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난손(鄭蘭孫)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정광세(鄭光世)이며, 어머니는 배조(裵稠)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를 거쳐 1506년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 검열에 임용된 뒤 대교를 거쳐 1507년(중종 2) 봉교가 되었다. 이 때 동료 김흠조(金欽祖)와 함께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과 사관(史官)의 직필(直筆)을 보장해줄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전적·공조좌랑·형조좌랑·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황해도도사·병조정랑·공조정랑·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뒤, 1511년 헌납이 되었다. 그 뒤 지평·장령·집의·승문원참교·내자시정(內資寺正)·사섬시정(司贍寺正)·사재감정을 역임하였다.
1518년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으나,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탄핵을 받아 곧 이조참의로 옮겼다.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대간의 탄핵으로 공조참의로 피척(被斥)되어 수년 있다가 죽었다.
침착하고 행동이 곧으며 말이 없고 근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잘못을 들추지 않고 담박(淡泊)하여 명리에 급급하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