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양래(陽來). 호는 정헌(靖軒). 정지화(鄭至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재후(鄭載厚)이고, 아버지는 정제선(鄭濟先)이다. 어머니는 이상연(李尙淵)의 딸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사부학당(四部學堂)을 거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1720년(경종 1)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묘배향을 상소하였다. 1725년(영조 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1727년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응교로 승진하였다.
1729년 사헌부지평이 되어 기강 확립에 대한 소신을 상소했는데,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이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개탄하면서, 왕은 총명하게 모든 사태를 관찰하고 판단하여 이러한 일을 막아야 하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 수양의 근본이라고 역설하였다.
1732년에 다시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관들의 치적을 살피고 시찰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지방관들이 기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관곡을 빌려주고 있었는데, 특히 고부군(古阜郡)에서는 원하지도 않는데 무리하게 대여하고는 뒤에 강제로 수납하고 있어 원성이 높으니 이를 시정해야 한다는 것과, 태조가 왜구를 물리친 기념으로 운봉황산(雲峰荒山)에 있는 전승기념비각을 수령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퇴락하고 있으니 이를 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어, 지방관을 채용할 때는 반드시 정직하고 조심성 있는 인재를 가려 원성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1734년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으로 발탁되어 민정을 살폈으며, 전라좌도에는 진전(陳田)이 많으니 재결(災結)을 늘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40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우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추천으로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43년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744년에는 대사성을 거쳐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747년(영조23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1748년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인 정석오(鄭錫五)를 따라 부사 자격으로 중국에 가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대사간이 되어 아랫사람들의 의견이 윗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언로를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1750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이 때 도민들이 흉년으로 고통받는 딱한 사정을 덜어주기 위해 부과되는 조세와 부역을 줄여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구제 양곡을 더 많이 배정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1753년 호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는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천거로 정경(正卿)으로 승진하였다.
여러 차례 수령과 방백을 역임하면서 관기를 확립하고 올바른 행정을 폈기 때문에 백성들은 좋아했고 관리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1755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759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결전(結錢)을 감할 것을 청하였다.
1768년에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사대부들의 기풍과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아 국가의 재정을 확립하며, 백성들의 편안함을 위해 수령의 선발에 유의해야 한다고 왕에게 상소하였다.
이듬해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로서 지배층의 기강 확립과 검소한 생활 태도를 수립하기 위해 사대부들 중 축기(蓄妓)한 자들을 색출하였다. 그가 죽자 영조는 매우 슬퍼하면서 스스로 제문을 지어보내는 한편, 그의 아들을 발탁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후 1796년(정조 20) 5월 9일 청백리 5인에 포함되는 영예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