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용(稚用), 호는 연암(烟巖). 서울 출생. 조명준(曺命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윤대(曺允大)이고, 아버지는 조용진(曺龍振)이며, 어머니는 신작(申綽)의 딸이다.
1835년(헌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52년(철종 3)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지방을 다스리면서, 1854년 고조부 하망(夏望)의 문집인 『서주집(西州集)』을 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윤증(尹拯)에 대한 제문 속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한 글을 삭제한 것이 말썽을 빚어 유생의 줄기찬 항의로 파직당하여 중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857년 석방되어 공조참판에 올랐으며, 그 뒤 1867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