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3월 3일, 조선무역협회장 가토(加藤敬三郎)를 회장으로 하여 “아시아의 대세와 시국의 진상을 규명하고, 황국 대일본과 아시아 제국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평화를 확보하고, 공존 공명의 실(實)을 거(擧)하여 그 복지를 증진함.”을 표방, 결성되었다.
일제의 ‘대아시아주의’는 메이지(明治)기 초엽에 형성된 아시아연대사상의 연장으로, 일제의 아시아 침략 정략 및 조선의 지정학적 입장을 토대로 생겨났다.
대륙의 강국이 한반도를 손에 넣으면 동해·서해와 대마해협(對馬海峽)을 잃게 되어 일본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에서 일제의 조일안보연계론과 그 연장인 일선일가(日鮮一家)·선만일여(鮮滿一如)의 논의가 생겨났다.
일·선·만을 하나로 묶는 이러한 논리를 몽고·동남아까지 확대한 것이 대아시아주의요, 그 연장인 대동아공영권론이다. 즉, 일본 중심의 동아블럭사상인데, 만주사변을 무마하고 합리화할 필요에서 1931년을 전후해 크게 일어났다.
이 협회는 위의 대아시아주의 및 황도사상을 연구, 보급, 실천하며,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정세 및 아시아 제국의 국정(國情) 연구와 그 보급 등을 실천 사업으로 하였다. 조직은 회장 1명과 상담역 약간 명, 간사 10명 이내로, 회장 중심 체제이다.
창설 당시의 회장은 전술하였듯이 가토이며, 임기 2년제였다. 상담역은 관료 출신 및 재계 거물인 일본인 30명과 조선인 언론계 3명, 친일 거두 12명(합계 45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상담역은 방응모(方應謨)·송진우(宋鎭禹)·여운형(呂運亨)의 세 언론인과, 제1급 친일 거두인 고희준(高羲駿)·김명준(金明濬)·민대식(閔大植)·박영철(朴榮喆)·박영효(朴泳孝)·박춘금(朴春琴)·신석린(申錫麟)·예종석(芮宗錫)·원덕상(元悳常)·윤치호(尹致昊)·조성근(趙性根)·한상룡(韓相龍)의 15명이었다. 회원은 일반 공모제(公募制)였고, 강연회·좌담회·출판물로써 흥아사상을 보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