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5월 2일 서울에서 한·일인 합동으로 조직되었다. 주동은 총독부 학무국이며, 김영환(金泳煥)·이광수(李光洙)·최남선(崔南善)과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카기(高木市之助) 등을 중심으로 문인·음악가·학자·방송 관계자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총독 우가키(宇垣一成) 시절의 심전개발(心田開發)·정신작흥(精神作興)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섰던 단체의 하나인데, 레코드·연극·영화·라디오 등 문예와 연예방면의 교화로써 사회풍교를 정화하면서, 이른바 국체명징(國體明徵)의 정신작흥운동에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조선문예회는 창립 직후부터 건전가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건전가요운동은 1937년 7월의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이른바 총후보국(銃後報國)의 애국가요운동으로 선회하면서, 「종군간호부의 노래」(김안서 작사, 이면상 작곡), 「정의의 개가」(최남선 작사, 홍난파 작곡), 「장성(長城)의 파수」(최남선 작사, 현제명 작곡) 등 이른바 ‘애국가요’를 낳게 하였다.
이들 20여편의 신작가요를 한데 묶어서 ‘총후 반도의 애국가요대회(1937.9.30, 부민관)’를 연 것 등이 조선문예회의 중요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