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을 개칭한 좌익계의 항일청년단체이다.
본래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은 1938년 6월 10일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당원 가운데 당의 노선과 당수 김원봉(金元鳳)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최창석(崔昌錫)·왕해공·김원길 등 주로 성자군관학교(星子軍官學校) 졸업생 49명이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해 조직한 것으로 한커우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뒤 김원봉 측의 종용도 있고 재정 상의 어려움 때문에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에 복귀하였다. 같은 해 9월 초순 조선민족청년전시복무단은 명칭을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고치고 활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이 중심이 된 민족통일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 가맹하였다.
10월 10일에는 김원봉이 대장이 되어 개편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핵심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내의 이 동맹에 속한 좌파계 인물들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가고 김원봉을 비롯한 일부 의용대원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흡수되었다.
한편, 이 동맹에 속해 있던 청년들은 김원봉의 교섭으로 난징(南京)의 중앙군관학교에 설치된 특별반에 들어가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의 군사교관은 김홍일, 소대장은 이익성(李益星)이었는데 1년에 120여 명의 한국청년이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동맹은 조선민족혁명당 내에서도 차차 그 위치를 확고히 하여 무시못할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 무렵의 이 동맹에는 뒤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로 항일전에 활약한 김학무(金學武)·이상조(李相朝)·김창만(金昌滿) 등이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요한 임무였던 항일전쟁에서 이 동맹은 정찰·선전공작 등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말에 우창(武昌)·한커우가 일본군에게 함락된 뒤에는 군사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당시의 이 동맹의 진용에는 맹주에 김학무, 맹원에 진동명·박무·강진세·김창만·김경설·허금산·이철·조명숙·김엽·공명우·안창선·박창진의 이름이 일제 관헌 측 문서에 전하고 있어 초창기의 중진들이 이미 이 동맹을 떠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일전쟁의 전황이 점차 중국 측에 불리해지면서 조선민족혁명당계의 인사들은 중국국민정부의 후퇴와 함께 충칭(重慶)으로 옮겨갔고 이 동맹의 좌파인사들은 뤄양(洛陽)을 거쳐 옌안으로 향하였다.